초,중,고등학교 농구 코트를 점령한 "레전드 허재 선수"

Posted by 건축시공기술사 사&슬 파파
2021. 5. 24. 13:16 농구 이야기/한국 농구 KBL

농구 시작 그리고 라이벌 - 상명 초등학교 농구 시작

  그가 처음으로 농구공을 잡은 시기는 상명 초등학교 4학년때입니다. 당시 이 학교에는 농구 신동이라 불리는 2년 선배 유재학 선수가 있었습니다.(이미 유재학선수는 TV중계 및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유재학이라는 선배는 본받아야 할 선배지만 넘어할 라이벌로 이미 자리를 잡 고 있었습니다. 유재학은 허재에게 자극이 되고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둘은 서로 인정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절대 지지 않으려는 라이벌이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설부터 스타성은 물론이고 개인 능력이 뛰어나서 현란한 드리블에 의한 돌파로 득점은 물론 혼자 모든 것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대회에서 1점을 뒤진채로 종료 직전에 파울로 자유투를 얻었습니다.초등학생의 자유 성공률이 매우 낮았으며 이 당시 허재도 자유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였지만 이때도 승부사 기질이 있었는지 2개를 모두 집어넣어 팀을 우승을 시켰습니다.

 

 그는 승리라는 공식이 붙어다닐때 쯤 허재의 초등시절 유일한 패배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나이를 속이고 출전했다고 생각될 만큼의 장신이 있었습니다.(이 당시 부정선수가 소년체전에 출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였습니다) 허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는 장신 선수의 팀에 승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농구 시합은 허재 하기 나름 - 용산고등학교  

 그가 용산중학교를 거쳐 용산고 1학년이었던 당시 유재학의 경복고가 최강으로 군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상만, 김윤호, 유재학은 그 해 전국대회를 휩쓸며 강자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재학은 한국 농구에서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서 넓은 시야, 낮고 빠른 드리블, 경기에 대한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영리한 머리를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는 이런 유재학의 스타일에 힘과 승부근성 그리고 높이가 더해진 선수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1학년때부터 진가를 나타내어 용산고를 대회 우승으로 팀을 이끌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2학년때부터는 현재의 키와 근육이 붙어 초고교급의 선수로 더욱 더 진화하게 됩니다.

 

 

 그는 고등학교 내내  팀을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 하면서 고등학교을 제패하였습니다. 언제나 승리만 하던 허재에게도 패배가 있었습니다. 바로 3학년이던 쌍용기 대회 예선에서 영원한 맞수 휘문고와의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당연히 용산고의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다음날 언론기사에서 나왔듯이 "병주고 약준 허재"란 머릿기사에서도 알수 있듯이 허재는 이 경기에서 전반 내내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 후반들어 전반에 벌어진 점수차이를 맹렬히 쫓아가서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2점차 까지 따라갔지만 허재의 마지막 회심의 패스를 같은 팀 선수가 잡지 못해 패배를 한 경기였습니다. 물론 결승전에선 용산고가 예선의 패배를 설욕하고 우승을 하였습니다.

 

◆ 농구 대통령 허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농구 전성기를 같이 보낸 김유택 선수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허재는 고등학생 때 정말 잘했습니다.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했죠. 국가대표를 뽑으면 가드로 선발될 때도 있고, 포워드로 선발될 때도 있었죠. 한 마디로 둘 다 가능한 선수였어요. 포인트 가드 역활도 가능했으니까요. 허재는 다방면에서 강점이 있었어요. 자기가 만들어서 득점할 수 있는 테크닉이 있었습니다. ---- 김유택 선수

 

 

 그 시기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이런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 허재의 신출귀몰한 슛과 어시스트로 승리했다" - 매일경제(1981년)

" 용산고는 리바운드 열세를 허재, 전창진의 속공으로 극복했다-동아일보(1981년)

"한국농구의 장래를 걸 만큼 소질을 타고난 선수다 - 동아일보(1983년)

 

 

 "어느 대회 결승전 경기였습니다. 허재가 속공 상황에서 달려들어오면서 자유투 라인 부근에서 공을 건네받았죠. 이때 상대 선수 2명이 골 밑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공을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턴하면서 두 명을 따돌리고 완벽한 스텝으로 레이업을 올렸습니다. 당시 해설자들도 본 적 없는 플레이라 아무말도 못했고, 관중들조차 놀라서 함성을 지를수가 없을 정도의 환상의 플레이가 있었습니다"

 

 

 "어릴때는 체격이 조금 왜소했어요. 그래도 실력은 좋았죠. 왠만한 대학생들도 용산고를 이기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용산고에서 허재는 1인 2역을 했습니다. 테크닉이 정말 좋았어요" 그는 국내 대회 뿐만 아니라 해외 대회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일본 원정 순회 경기에서는 허재만 막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허재를 막기 위해 전략을 세울 정도였으며, 결승전에서는 허재에 의해 중국은 농락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정말 타고난 천재였을까

  농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허재의 실력은 첫번째는 "노력"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 농구부 훈련이 끝나면 놀러 가곤 했죠. 그런데 허재는 놀다가도 시간이 되면 혼자 체육관으로 향했어요. 저녁 7시, 8시쯤이었을 거에요. 거기서 줄넘기를 했죠. 3,000개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으면 꼭 다하고 돌아갔어요. 그리고 집에 가서 또 훈련을 했죠. 새벽에도 농구 훈련을 하고 등교했다고 들었어요"

 

 

  그는 팀 훈련은 훈련대로 소화하고 남들이 보지 않는곳에서 개인 훈련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산고 훈련은 강도가 높기로 소문이 나있는 학교였습니다.(납조끼,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 일은 예삿일이었습니다)이런 팀훈련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왔던것입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주변에서 허재를 봐왔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정말 지는걸 싫어했던 선수였다" "승부욕은 정말 타고난 선수"  그는 중학생 때부터 대회에 나가서 뛰는 걸 보면 정말 "독종"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경기에 관해서는 정말 대단한 승부욕이 있었습니다."두번은 지지 않겠다"는 마음 가짐 말이죠.

 

 허재는 승부욕으로 인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초고교급의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 과연 두번째는 무엇일까요? 바로 부친의 "정성"입니다.  그의 아버님은 권투를 하셨던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을 해야 아이가 체력이 좋아지는지 연구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허재와 아버지하면 가장 자주 나오는 일화가 바로 "집 안의 농구코트"입니다. 주택의 정원을 싹 밀고 시멘트 바닥을 깔고서 골대를 설치해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시기에는 스킬 트레이닝이라는 개념이 없을때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어떻게 하면 드리블을 잘할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바닥을 보지 않고 드리블을 하면 잘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서 미국에서 특별 안경을 구해서 허재에게 안경을 씌우고 훈련을 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오르는 과정에서 키가 자랐습니다. 172cm정도 되던 키가 고등학교 입학 무렵에 185cm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허재의 아버님은 원조가 대단했습니다. 뱀은 물론이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서 직접 확인한 다음에 허재에게 먹였습니다. 그 정도로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이렇듯 허재의 학창시절은 본인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인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아버님의 지극 정성으로 이뤄진 선수입니다. 학창시절부터 누구보다도 남달랐던 승부욕과 노력으로 대한민국 레전드 넘버 원이 된 허재.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