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시절 대학 농구를 평정한 “초특급 선수 허재”

Posted by 건축시공기술사 사&슬 파파
2021. 12. 3. 12:35 농구 이야기/한국 농구 KBL

 초고교급선수 허재 중앙대에 입학하다.

 용산고 시절부터 차세대 특급 가드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허재는 용산고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대학들로부터 엄청나게 열렬한 구애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가 가장 적극적으로 그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까지 그는 대학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스카우트는 언론도 큰 관심사였습니다. 일간스포츠에는 박스기사로 '스카웃 비상, 허재를 잡아라'가 실렸습니다.

 당시의 기사를 보겠습니다 “<초고교급 농구 영스타 허재를 잡아라. 용산고 농구팀의 주장 겸 졸업반인 허재는 청소년대표팀의 가드출신. 187cm 73kg, 서전트 점프 80cm로 가드로서는 보기 드물게 좋은 체격조건을 지녔다. 시야가 넓어 민첩한 볼피딩이 가능하며 70% 정도의 야투율을 자랑한다. 게다가 컨트롤 좋은 드리블로 골밑까지 파고들어 골을 잡아낸다.이 예비스타에 눈독을 들이는 대학은 최근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의 3파전으로 압축됐다. 그중에서도 선두주자를 달리는 팀은 중앙대. 중앙대는 5~6년전부터 용산고 체육관을 빌려쓰면서 친분관계를 맺어왔다. 이렇듯 불티나게 뛰는 각 대학 측이 "허재는 우리 학교에"라고 선포할 수 없는 것은 열쇠를 쥐고 있는 허재의 아버지 허준씨가 구체적인 방향결정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 허준씨는 "금년초 용산고 양문의코치와 학부형들이 모여 올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진학문제는 언급치 않기로 합의했다"면서 "연,고대와 중대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는 9월 중순 쌍용기대회가 끝난 뒤에야 결정할 것"이라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공식 결정을 미뤄놓은 덕에 그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솟았습니다. 결국 그해 8월 27일자 일간스포츠 3면에는 톱기사로 '스카우트의 핵은 허재'가 실렸습니다. 홍진수기자가 쓴 이 기사에는 허재를 비롯, 그 해 대어들을 자세히 소개해서 흥미롭습니다. 허재에 이어 랭킹 2위로 꼽히는 선수는 센터 조현길(195 마산) 3위는 센터 김종석(193 광주) 4위 이민형(190인데 센터)을 지목하며 '스카우터들이 군침을 흘리는 재목"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연세대는 랭킹2위 조현길과 홍성택 유한욱 황상하를 스카우트했습니다. 고려대는 이민형선수를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앙대로 갈거라는 일부 예상과 달리 고대쪽으로 기운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3학년 한기범 선수, 2학년 김유택 선수등 장신듀오를 앞세운 중앙대가 시즌 2관왕에 오르는 등 스카우트에 다소 여유를 부리는 반면 고려대는 여름방학동안 그를 스카우트하기위해 열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중앙대 진학. 그의 부친, 허준(작고) 씨를 끈질기게 설득한 정봉섭 감독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던 것입니다. 중앙대 정봉섭 감독은 허재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점찍어놓았습니다. 당시 중앙대가 연습장이 없어 용산고 체육관을 많이 빌려썼는데 자연스레 그를 알게되었고, 특히 허재의 부친 허준씨와 남다른 신뢰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런이유로 인해 아버지의 의사로 그는 중앙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무대를 평정하다

 84년 봄 그는 농구계의 관심속에 대학 무대 데뷔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용산 고교에서는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대학 1학년 풋내기에 불과한 그의 기량이 대학 무대에선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세인들의 관심 거리였습니다.

 예선 첫 경기부터 그는 엄청난 활약으로 중앙대를 이끌며 상대 대학을 압도하는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단지 몇 경기만에 초고교급 선수에서 대학 최정상급 반열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를 해버렸고 결승전까지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결승전 상대는 당시 최강인 고려대였습니다.

 

 결승전에서도 그는 원맨 드리블 쇼를 펼치며 자기 편 코트에서부터 5명의 고대 선수를 차례로 돌파하는 신기를 보여주며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농구란 이런것이라는것을 결승에서 보여주며 전천후 활약을 하였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우승이었습니다. 이 날의 우승은 중대 신화의 시작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중대 농구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외곽 의존적인 기존 농구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게 인사이드를 공략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더블 포스트에 한기범, 김유택, 포워드에 이경영, 강정수 그리고 포인트 가드에 허재가 포진한 중대는 매 경기 100점 이상을 쏟아 부으며 대학을 빠르게 평정해 나갔습니다.

 

 새로운 볼거리에 팬들은 열광했습니다. 2년뒤 가세한 강동희가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슛팅 가드로 변신한 그는 그의 재학 4년간 대학팀간 경기에서 한 게임도 놓치지 않고 전승으로 팀을 이끌었습니다. 이미 그의 1학년 시절부터 대학팀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현대와 삼성이 버티고 있던 실업 농구와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업 농구 정벌에 나서다

 83년 겨울부터 시작된 농구대잔치는 첫 시즌인 83-84 시즌에 현대에게 우승을 안기면서 화려한 출발을 하였습니다. 당시 현대와 삼성이 벌이던 용호상박의 대결은, 비록 과열된 승부욕이 만들어낸 부작용이 존재하기는 했었지만, 농구의 질을 높이고 팬을 경기장으로 모으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84-85 시즌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여러모로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해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습니다.

 

 그는 85-86 농구대잔치에서 노련미가 넘치는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농구팀을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전까지 이끌었습니다. 결승전에서 현대전자를 상대로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선수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했지만, 신들린 슈터 괴물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와 현대 선수들의 폭력수비와 편파 판정이 더해지며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강동희 선수가 가세한 86-87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중대는 절호의 정상등극 기회를 잡았습니다. 김유택(4학년), 허재(3학년), 강동희(1학년)로 짜여진, 이른바 허동택 농구가 탄생한 역사적인 시기였습니다. 1,2,3차 리그를 통해 물고 물리는 접전을 계속하던 현대와 중대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다시 맞붙게 되었지만, 또 한 번 이충희와 현대에게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습니다.

 

 대학 4학년 때는 김유택도 없고 한기범도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 역할까지 하며 활약,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만들어냈습니다. 농구대잔치에는 팀 내 부상자가 많아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허재 선수 농구대잔치 기록

☞ 1984년 중앙대 소속 18경기 평균 득점 24.00 리바운드 8개 어시스트 6.22 기록

☞ 1985년 중앙대 소속 13경기 평균 득점 20.26 리바운드 6.53개 어시스트 3.07 기록

☞ 1986년 중앙대 소속 23경기 평균 득점 24.13 리바운드 7.43개 어시스트 3.69 기록

☞ 1987년 중앙대 대회 불참 

 

 그는 대학시절 대학 수준과 실업 팀의 수준을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학 평정 이 후 실업팀의 엄청난 견제를 극복하지 못해 비록 최종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실력은 우승 이상의 실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당시 그가 없는 대학 무대 결승과 농구대잔치는 상상도 못 할 일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녔습니다. 허재 선수가 만들어냈던 농구 인기가 다시 한번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