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대회에서 한국을 이끈 초특급 에이스 “농구 천재 허재 선수”

Posted by 건축시공기술사 사&슬 파파
2021. 12. 3. 12:46 농구 이야기/한국 농구 KBL

 그가 대학 1년때인 84년은 국제 대회가 없었던 관계로 국가대표 구성이 이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대학시절 그의 국가 대표로서의 경력은 8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83년 ABC 직후 대표팀 주전 가드였던 박수교 선수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85년 대표팀에 선발되자 마자 주전 가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85년 쿠알라룸프르 ABC 대회에서 한국은 한기범과 김유택 두 장신의 센터진을 구성해서 중국과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그 이전까지 외곽 일변도인 농구에서 벗어나 인사이드에서 정면 승부를 걸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경기 초반 의욕적으로 기 싸움을 펼치며 골밑 공방을 벌이던 이날 경기는 한국의 쌍돛대가 너무나 쉽게 파울 트러블에 걸리면서 또 다시 골밑을 점령당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대학 2년생인 허재가 있었습니다. 그의 활약 속에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게임을 펼치면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 국제대회에서 에이스로 등극하다

  그는 경기 중반 속공 찬스에서 중국 선수를 앞에 두고 좌우로 번갈아 드리블을 구사하며 수비수를 몰며 완벽한 스톱 모션에 이은 레이업을 통해 득점을 만들며 맹활약하였습니다. 비록 이 날 경기에서 한국은 중국에 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이충희와 더불어 베스트 5에 뽑히면서 일약 아시아 최고 선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0세였습니다.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은 홈에서 펼쳐지는 만큼 중국 타도의 좋은 기회였지만 주전 센터였던 조동우 선수의 부상 재발로 인해 경기에서 제외되었고, 그는 당시 발목 이상으로 제대로 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중국에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87년 방콕 ABC에선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을 펼쳤지만 결국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중국전 3연패를 당한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선 이충희가 준우승팀의 핸디캡을 딛고 MVP를 받았으며, 그는 베스트 5에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 최강의 멤버들과 우승을 일궈내다

 올림픽을 앞두고 개편된 87년 대표팀은 사상 최강의 외곽 라인을 갖춘 호화 멤버로 구성하였습니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 유재학이 포진한 대표팀은 그 진가를 곧바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만 존스배에서 비록 대학팀이지만 실력에서 차이가 없던 미국팀을 격파했으며, 87년 서울 프레올림픽에선 예선에서 당시 최고 유럽 선수들을 보유한 유고 실업 선발팀을 격파. 결승에선 유럽 최강팀 체코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의 첫 게임에서 한국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이충희와 이문규가 경기 전날 무단 외박에 이은 음주로 방열 감독의 제재를 받는 바람에 정상적인 선수 기용이 안된 이 경기는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 경기입니다. 그러나 대표팀은 마지막 예선전인 대 유고전에서 한국 농구 사상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87년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의 주역이던 쿠코치, 페트로비치, 디바치, 라자등 전, 현 NBA 스타들이 버티고 있던 유고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전을 리드로 마쳤고, 후반전에는 접전을 펼치는 등 센터진의 절대적인 열세속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농구를 보여주었습니다.

 89년 북경 ABC 경기에서 한국은 중국에게 무려 30점차의 완패를 당하였습니다. 강동희가 처음으로 대표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중국에게 큰 스코어 차이로 무너진 것입니다. 중국은 스피드가 부족한 초대형 센터 전략을 포기하고 높이가 낮더라도 기동력을 보유한 센터진과 강력한 파워 포워드를 무기로 한국을 보기 좋게 제압하였습니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이 변화된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허재-강동희의 투 가드 시스템을 선보인 한국은 절대적인 가드진의 우세를 바탕으로 철저한 30초 지연 작전을 펼치며 중국을 상대했습니다. 허재와 강동희는 월등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중국 코트 전체를 휘저으며 공격과 수비에서 맹활약하였지만, 3분 가량을 남기고 체력 저하에 의한 연속적인 턴오버 3개를 저지르면서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중국과의 일전에서 엄청난 실력으로 맹활약하며 팀 승리를 위해 뛰었지만 농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이긴 횟수보다 진 횟수가 더 많습니다. 이와 달리 세계 대회에선 괜찮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 순위 결정전에서 그는 이집트를 상대로 62점을 올렸습니다. FIBA 농구 월드컵 역사상 개인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이며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 새로운 멤버들과 국제대회에 나서다

 서장훈, 현주엽이 고교 농구 무대를 평정하던 91, 92년부터 농구계는 새로운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표팀은 이미 최고 수준의 허재와 강동희라는 가드진을 보유했고 문경은과 같은 장신 슛터가 등장했으며 한국팀의 취약 포지션인 포워드 그룹에 정재근이라는 유망주가 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이 두 선수의 출현은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한국 농구계의 새 희망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표팀은 로우 포스트에서 버틸 수 빅맨 센터와 강력한 파워 포워드가 다른 어떤 포지션보다도 절실하던 처지였습니다. 이 때 서장훈과 현주엽이 등장한 것입니다.

 

 91년 고베 ABC 대회에서, 비록 이충희가 빠졌지만 김현준이 워낙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고, 허재와 강동희가 절정의 기량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회 일주일 전에 열린 미국 대학팀과의 평가전에서 맹활약하던 그는 리바운드 과정에서 상대 반칙으로 인해 코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만 오른손등 골절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깁스를 하고 참가한 ABC에서 그는 준결승까지 한번도 경기에 참여를 못하고 벤치를 지켰고,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그는 투혼을 발휘해 깁스를 풀고 코트에 나서기는 했지만 도저히 정상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93년 상해 동아시아 경기에서 중국을 상대로 허재, 강동희의 맹활약으로 막판까지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체력 부족으로 아쉽게 패배하였습니다. 93년 11월 자카르타 ABC를 앞두고 농구협회는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어의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한국은 드림팀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며 대회에 참가했지만 실마리를 전혀 풀지 못하는 답답한 게임 전개를 진행하며 패배. 결국 그의 가치를 확인해 주는 성과만을 올렸습니다.

 

 다시 대표팀에 합류한 그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중국과 격돌했습니다. 서장훈, 전희철등 신인 유망주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 대회에서 그는 내,외곽에서 미친듯이 몰아쳤습니다. 사실 그 동안 중국팀은 그를 한 번도 효과적으로 봉쇄한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봉쇄하기가 불가능했다는게 맞는 말입니다.

 

 그는 화려한 스텝과 방향 전환에 이은 공격력을 선보였습니다. 중국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파울밖에 없었습니다. 무수한 파울이 그를 막기위해 쏟아졌지만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이 중국을 공략하던 그에게 중국 선수는 무릎을 사용해서 허재의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히며 그를 코트에서 쓰러지게 만들며 코트밖으로 물너나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빠지자 마자 리드하던 경기는 순식간에 뒤집히고, 한국팀은 우왕좌왕하다가 대패를 당하였습니다.

 

 94년 토론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대회에서 3승을 따내며 국제 대회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능성의 한 축은 역시 허재였고, 다른 한 축은 서장훈이었습니다. 서장훈은 게임을 거듭할수록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면서 안정된 리바운드를 공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95년 서울 ABC 대회는 국제 대회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한국과 중국의 진검 승부가 예상되는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장훈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 대표팀 불참 했지만 현주엽과 전희철이 골밑에서 실력 이상의 맹활약을 보여주며 선전했고, 허재가 대회 MVP에 선정될 정도로 완벽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문경은을 필두로 한 외곽 슛터의 극도의 부진속에서 또 다시 중국에 패배하며 대회를 끝내야 했습니다.

 

◆ 대표팀의 영원한 에이스 허재 선수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센터 없는 농구로 참패를 했던 한국은, 97년부터 그를 제외한 채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하였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96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국제 대회에서 허재만큼 위력적인 돌파로 팀의 숨통을 틔워준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는 여러 모로 대한민국 에이스다운 활약을 했습니다. 대표선수로서 중국과의 경기에서 2승이상 거둔 선수는 근 30년간 통틀어봐도 몇 되지 않습니다. 85년 ABC 및 88올림픽에서 중국에게 2승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85년 ABC 준결승전은 역대 중국전 승리 중 전,후반 개별스코어 모두 앞선 유일무이한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표팀에서 뛰던 시절 중국과의 승률은 높지 않지만 20점 이상 맥없이 무너지는 경기는 그가 제대로 뛴 경기에서는 없었습니다.

 

 비록 그는 중국 대표팀에게 몇 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쟁취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에이스다운 활약으로 팀을 이끌었고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 top3 레벨인 중국 대표팀이 에이스킬러 짓을 불사할 정도였다는 건 그가 얼마나 무서운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중국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농구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어 이제는 중국만 넘으면 아시아 정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현재 국가 대표팀 감독을 대한민국 영원한 에이스인 허재가 맡고 있습니다. 부디 대표팀을 잘 이끌어주셔서 앞으로의 국제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허재 감독님 화이팅!!!!